블랙
나에게 블랙은 색 이전의 색이다. 좋아하는 색이 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한 번도 블랙을 다른 색깔들 속에 포함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. 그린이나 레드 등은 분명한 색깔을 가진 하나의 색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블랙은 여러 가지 색 중에서 하나가 아니었다. 그러니까 블랙은 알록달록한 색깔에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색이었다.
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제일 먼저 쓰게 된 색이 블랙이다. 왜 블랙에 이끌리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. 옷장 속에 옷의 칠팔십 퍼센트가 검은색인 이유를 밝힐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. 블랙 시리즈를 한창 그릴 때는 하얀색 캔버스에 검은 점 하나를 찍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흥분될 정도로 블랙은 매혹적이었다. 도도한 블랙의 매력은 간결하면서도 깊었다. 선 하나를 그은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것이 블랙의 세계였다. 블랙 자체의 에너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나는 블랙 시리즈를 그리면서 항상 생각보다 일찍 그림을 끝내야 했다. 블랙은, 내가 생각했던 그림을 다 그리기도 전에 스스로 완전해짐으로써 더 이상의 붓질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. 때문에 블랙 시리즈를 그리면서 절제를 배울 수 있었다. 처음 그림을 시작한 나에게 블랙이 요구하는 절제의 미학은 때로 가혹했지만 그래도 나는 블랙의 매력에 한참 동안 빠져 있었다. 이 그림은 그때 그린 블랙 시리즈 중 하나이다.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블랙 시리즈의 다른 어떤 그림을 그릴 때보다 더 블랙을 자제하면서 그렸다. 그런데도 블랙은 아주 조금 사용한 것만으로도 힘이 넘쳐, 키가 작은 나무를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가 되었다.